베트남 감리교회 문맹퇴치 사역자 탄 이야기
- 전도부인 선교사역의 열매 -

▲ 베트남감리교회신학교기숙사에서. 가운데가 필자
김명래 전도사/한인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
지난 11월 5일부터 7일까지 2박3일간 베트남에서 감리교회 여선교회 훈련 세미나가 있었 는데 이 세미나는 지난 7월 싱가폴에서 열린 ‘아시아 기독여성 지도자 훈련세미나’ 에 참석했던 베트남 감리교회 여선교회 지도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는 한인여선교회 전국 연합회가 조직된 후 아시아 전도부인 선교사역의 일환으로 실시된 최초의 여선교회 훈련세미나 였으며 더우기 작년에 한국여선교회 전국연합회와 자매결연을 맺은후 최초로 연대하여 실시한 선교 사역이기에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이와같은 선교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400여개 교회 한인여선교회 회원들이 시간과 기도와 물질로서 ‘아시아 전도부인 선교사역’을 지 원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보다 나은 미래를 갖게 한다’
아시아에는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빈곤과 문맹으로 어려움을 겪고있으며, 종교적으로는 이슬 람교, 불교, 힌두교, 샤머니즘 아래 살고있으며,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민주주의적 집회와 언론의 자유가 크게 제약받는 나라에 살면서 많은 여성들이 미래에 대한 소망없이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시아 여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보다 나은 미래를 갖게 한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도부인 선교사역은 많은 영혼을 살리는 매우 귀중한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국 여선교회의 ‘선교의 열매’로 성장한 한인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를 부르셔서 이 중요한 사역을 맡기셨다고 나는 믿는다.
베트남 감리교회 여선교회 훈련세미나에서 나는 ‘탄’이라는 전도부인을 만났다. 그녀를 올 여름 싱가폴에서 열린 아시아기독여성 지도력세미나에서 처음 만났고, 이번은 두번째 만남 이었다. 그녀는 전도부인 선교사역으로 문맹퇴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사역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우리 한인여선교회 전국연합회 회원들께 소개하고자 한다.
베트남 남부에서 1968년에 출생한 탄은1975년 베트남 전쟁 중 7살 이었는데 폭격을 피해 도망치며 시체를 넘어 달리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당시 많은 군인이 죽고, 어린이들이 부모를 잃었는데 많은 부상자들이 팔과 다리를 잃었던 그 당시 기억을 그녀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이 통일되고. 그 후 가난과 굶주림이 시작되었고 많은 이들이 먹을 게 없었다. 쌀이 없어서 매일 고구마, 카사바, 바나나의 과일 부분이 아닌 열매 부분(bulb of banana tree) 등을 먹었다. 입을 옷도 없었다. 약품이 없어서 아픈 사람은 그냥 죽어갔다. 32년 전 일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카사바로 된 음식. 어머니는 옷의 어깨 부분 색이 바래도록 입으셨던 것을 기억한다.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전쟁 때문에 벌어진 많은 나쁜 일들-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가운데서도 우리 가족이 무사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이 지켜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고 그녀는 증언했다. 다음은 그녀의 증언이다.
“나는9형제 중 7번째로 출생하였다. 당시 우리 가족은 불교를 열심히 믿었다. 매달 한번씩 절에 가서 평화와 안녕을 위해 돈과 음식을 바쳤으나 아무리 빌어도 평화가 없었다. 내가 6살 때 17살이던 큰 오빠가 복음을 알게 되어 온 가족을 전도했다. 처음에는 동생들을 전도했고 나중에는 부모님이 믿게 되었다. (큰 오빠는 부모님을 12년 걸려 전도했는데 부모님이 200명 이상을 전도했다.) 점차 우리 가족은 가난에서 벗어났다. 부모님은 갈라디아서 5:22에 따라 우리 형제에게 집에서만 부르는 이름을 하나씩 지어주셨다.
가정교회에 돌아다니며 교회학교 인도하다
1990년 어느 일요일, 가정교회에서 목사님이 불에 타 죽는 사람의 그림을 보여주며 설교 하셨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렇게 죽게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나는 그 메시지에 깊이 동감하고 잃어버린 양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8천만 베트남인을 구원할 꿈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 전엔 뜨겁지 않은 교인이었다. 특히 교회 어린이들이 기독교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목사님 허락을 받아 어린이 사역을 시작하였다. 어린이들은 교사와 부모, 목사님이 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하얀 도화지와 같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10명 으로 교회학교를 시작하였는데 가정교회들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도 늘어 교사도 증가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자전거를 타고서 3. 5 킬로미터 떨어진 4-5개의 가정 교회로 다니며 교회학교를 인도했다. 나는 보석세공사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 교회학교 자료 구입 에 사용하였다. 나는 우리 지역의 유일한 보석세공사라서 그 당시 돈을 잘 벌었다. 당시 교회가 세워진지 3년 밖에 되지 않아 교회는 가난했고, 교인들도 매우 가난해서 어린이들을 위한 예산 이 따로 없었다.
1992년에 나의 가족이 어린이 사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여 나는 직장을 그만 두고 사역에 전념하게 되었다. 우리 지역에서 150-1,000km 떨어진 곳에 교회도 증가했고 내가 하는 사역도 늘어만 갔다. 가정교회에는 예배를 볼 장소가 따로 없었다. 어린이들을 위해 나무 아래서 (jack fruit, 망고 나무) 교실을 열었는데 플라스틱 의자와 칠판, 교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나와 교사 들은 공과책을 집필하고 복사하였다.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박해를 피해 숲속이나 벼를 심어놓은 들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어떤 경우는 배를 타고 강 복판에 나가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찬송 반주는 기타로 하였는데 기독교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성령의 감동으로 찬송을 크게 부르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크게 부를 수 없었기에 들키지 않도록 절제 해야만 했다. 1990년대는 예배 도중에 경찰이 와서 방해하고, 목사들이 잡혀가 2-3일간 구금 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1990년대에 베트남에는 도시는 물론 시골 구석까지 교회가 많이 생겼다.
베트남에서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이 시급했다. 베트남의 주요 종족인 킨(Kinh, 베트남인)과 Hoa(중국계) 이외에 52 개 소수민족들은 절대 빈곤 속에 살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이 문맹이었다. 전쟁과 가난 때문에 학교에 갈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특히 소수민족 기독교인의 90%가 문맹이었다. 질병, 가난의 대물림, 가난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나는 생각해 보았는데 교육을 받지못해서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자녀들을 가르칠 줄 모르고, 경제 개념이 없다. 여성들의 대부분이15-17세 때 결혼하고, 어린 엄마들은 자신과 자녀의 건강과 위생을 잘 돌볼 줄 모른다.
문맹퇴치 선교사역을 시작하다
목사님의 권유로 여성들에게 문맹퇴치 선교사역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역은 쉽지 않았는데, 각 소수민족의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거절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목사님의 격려로 시도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 잠도 못자고 밥도 못먹으며 걱정했다. 나는 먼저 여러 자료를 참조하여 베트남어로 교재를 만들었는데 2년이 걸렸다. 나는 교재와 방법을 시험하고나서 첫 수업을 열었다. 그 결과 나는 정말 놀랐다. 교재와 방법들이 교사들에게 가르치기 쉽고, 6세부터 70세 사이의 학생들이 배우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이를 목사님에게 보고했고, 목사님께서는 계속 여러 언어로 교재를 만들라고 격려해 주었다.
문맹퇴치 선교사역은 소수민족 기독교인부터 시작했지만 점차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개방되었다. 현재 총 9가지 소수민족 언어로 교재가 나왔으며 총 4천여명의 학생이 우리 수업을 들었고, 그 중 70%가 읽고 쓰게 되었다. 지난 10년간 이 사역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는데 만일 경찰이 알게 되면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소수민족을 통제하기 원하기 때문에 소수민족이 교육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곳에 가서 함께 교재를 만들었다. 200킬로 정도 떨어진 곳은 오토바이로 다니고, 그보다 먼 곳은 버스나 기차로 갔다. 소수 민족 언어로 된 교재와 사전이 여의치 않아 교재를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장실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문이 없어서 여성으로서 어려운 점이 많았다. 목욕은 밤에 집 밖에서 하였다. 또 소수민족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지만 대안이 없으므로 먹을 수 밖에 없었다. 현재는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어서 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중에서 교통사고가 제일 두려웠다. (필자 주: 지난 4년간 베트남 에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 숫자는52,000명) 호치민시에서 버스를 타고 500키로 떨어진 곳으로 가다가 자정쯤 교통사고가 나서 동료 한 명이 사망한 일도 있었다. 그 때 나도 타박상을 입었고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았는데 다른 버스로 갈아탈 수도 없었고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 했기 때문에 새벽 3-4시나 밤 9-10시에 주로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다녀야만 했다. 오토바이로 가다가 비 때문에 땅이 미끄럽고 물이 넘쳐 도착하기 전에 4번씩이나 넘어진 적도 있다. 팔에 상처가 많이 났지만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새벽의 물안개 때문에 오토바이 운전이 어려운 적이 많았다.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다닌 적도 많다. 또한 마을 상황에 따라서는 교재 만들기 작업을 할 때 같은 집에서 작업을 못하고, 같은 마을이라도 두 집에서 따로 작업을 해야했다. 메신저가 교재를 중간에서 갖다 주면 내가 체크한 후 보통 3일간 머물면서 작업하였는데, 같은 곳에 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양쪽 다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교재를 들켜서도 안된다. 소수민족 마을에 내가 떠난 직후에 경찰이 들이닥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보호해주셨다고 믿는다.
문맹퇴치 사역으로 새 삶을 살게 된 어린이들
감사하고 행복한 것은 내가 맨 먼저 가르쳤던 어린이들이 자라서 지금은 교사가 되어 내게 도움을 준다. 그 중 일부는 신학생이 되었다. 문맹퇴치 사역으로 학교 문턱에도 못 갈뻔한 사람들이 글자를 깨우치고 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가난 속에 있던 사람들의 살림이 나아졌고, 숫기가 없고 신앙이 약한 사람들이 지도력을 갖게 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성경을 읽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성경을 읽으며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10년간 나는 씨를 뿌렸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고, 풍부한 수확을 거두게 해주셨다. 하나님의 축복과 가족과 교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커다란 상이다. 어떤 이는 씨를 뿌리고, 어떤 이는 물을 준다.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 하나님의 계속해서 우리를 축복할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꿈
우리에게는 꿈이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무슨 꿈을 꾸어야 할까? 나는 오랫동안 꿈을 꾸어 왔는데 점차 실현되고 있다. 첫째는 52개의 모든 소수민족 언어로 교재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민족 모든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기독교 공동체에서 자라는 것이 내 꿈이다. 두번째 꿈은 소자본 프로그램(livelihood)으로 자본이 필요한 가난한 여성들에게 무이자로 3년간 대부해주고 장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 이전에 나는 그냥 교회에 다니는 보통 기독교인이었다. 나 자신에 초점을 두고 나의 행복을 추구하였다.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가 부족했고, 박해를 당할까 두려워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은 후 내 삶이 변했다. 이제는 내 안에 더 이상 내가 없는 듯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 항상 비추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항상 램프의 기름이 필요하다. 성령이 그 기름이다. 나는 항상 하나님이 내게 기름을 채워주시기를 기도한다. 성령이 돕지 않으셨다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만 두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신(faithful) 하나님이시다. 만약 성령의 기름이 없다면 채워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특히 여성으로서 살다보면 어려움이 더 많기 때문에 더욱 성령의 기름을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 되어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을 시키지 않으신다.” □







